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문단 편집) == 생애 == 레마르크는 1898년 6월 22일 독일 서부 [[베스트팔렌]]주의 [[오스나브뤼크]]에서 태어났다. 이후 철학에 관심을 두며 성장한다. 성 요한학교에 다니던 14살 땐 이미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프리드리히 니체]]와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철학서적을 탐독했다. 18세 때 1916년 뮌스턴 사범학교 재학 중 징집되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다. 본래 [[서부전선]]에 투입되었으나 부상을 입고 야전 병원에 수용되었다가 회복 후 보병연대로 배치되었다. 하지만 전쟁은 일주일 후 종전을 맞이한다. 전역 후 귀향해 교사가 되어 임시직 교사로 교직 생활을 시작했지만 얼마 안 가 그만두고 자신의 유년기를 추념하는 데뷔작 '꿈의 다락방'을 출간하게 된다. 그 후 편집인, 기자 등 여러 직종을 전전하다 1929년에 1차 대전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쓴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발표한다. 1931년에는 '서부전선 이상없다'의 속편 귀로를 발표한다. [[반전주의]] 작가로서 [[나치]]와 잦은 충돌 끝에 1931년 [[스위스]]로 망명하였고, 나치는 1933년 그의 작품을 [[분서]] 목록에 올려 공개적으로 불태웠다. 그의 여동생 엘프리데(Elfriede Remark)는 나치가 집권한 이후에도 평범한 재단사가 되어 독일에 남아있었다. 그런데 1943년에 반전(反戰)발언을 공개적으로 했다는 죄명으로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었고, 에리히 레마르크의 여동생이라는 연좌제까지 더해져서 악명높은 나치 판사인 [[롤란트 프라이슬러]][* 1944년 8월 히틀러 암살사건의 가담자들에게 냉혈한 사형판결을 때린 바로 그 인물. 1945년 2월 연합군의 폭격으로 사망하였다.]에게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해 12월에 엘프리데는 결국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에리히 레마르크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여동생 엘프리데의 비극적인 죽음을 비로소 알게되었다고 한다. 에리히는 1952년 소설 생명의 불꽃(Der Funke Leben)을 그녀에게 헌정하였다. 망명 작가로서 스위스에서 거주하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인 1939년에 [[미국]]으로 망명했다. 1945년에는 ''개선문'을 발표하였다. 1947년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였으나, 이듬해 스위스로 돌아왔다. 1954년에는 [[사랑할 때와 죽을 때]]를 발표하였다. 1958년에는 미국의 여배우 [[폴렛 고다드]]와 재혼하였다.[* 본래 [[찰리 채플린]]의 아내였고, 채플린과 결혼하기 전에도 채플린의 영화에 같이 출연하기도 했지만 이혼했다. 다만 이혼 이후에도 채플린과의 사이는 나빠지진 않아서 가끔씩 채플린을 만나기도 했고, 채플린의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이 사람이 바로 [[모던 타임즈]]의 여주인공인 떠돌이 소녀로 출연한 사람이다.] 1925년에 결혼한 첫 아내는 일제 유타 잠보나라는 배우인데 불화때문에 1930년에 이혼했지만 1933년에 같이 스위스에 도피하거나 그녀가 독일에 송환되지 않도록 도와주기 위해 1938년에 재혼해주는 등으로 어느 정도 친분은 있었다. 그녀와는 합의하에 1957년에 이혼했다. 이외에도 1930년대에 [[마를레네 디트리히]], [[헤디 라마르]], 돌로레스 델 리오 등의 배우들과 교제하기도 했다. 1970년 스위스 [[로카르노]]에서 7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작품은 전쟁에 대한 묘사나 전쟁중의 군인들이 겪는 내면, 외면의 심리묘사가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충격을 주는 힘이 대단하다. 또한 그의 작품은 대부분 우울하거나 건조한 문체가 특징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말한 것으로 잘 알려진 "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다."는 사실 그가 한 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